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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전 유서대필사건을 아십니까?

시사_정치

by 버섯돌이 2007. 11. 14.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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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퇴근길에 나를 너무 분노하게 만든 뉴스를 접했는데, 그 뉴스는 다름아닌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조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태우의 629선언을 이끌어냈던 87년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91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 하고, 유서대필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뉴스가 나온지 2시간이 지났지만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 91년에 대한 기억이다.

본 블로그는 IT전문 블로그, 범위를 좁혀서 인터넷전화(VoIP) 전문 블로그를 지향하지만, 이 소식을 접하고 이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91년 당시 나는 혈기왕성한 대학생이었고, 그 사건 현장에 있으면서 깊은 좌절을 맛보고 지금 내가 가진 가치관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그 사건을 전하고자 한다.


도대체 91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91년에 1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죽거나, 자신의 몸에 기름을 뿌려 분신해서 죽어갔다. 도대체 91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91년 2월 27일 명지대 발전위원회가 결렬되고 학교측이 등록금을 일방적으로 고지하자, 명지대학교 총학생회는 곧바로 등록 연기를 결의하였다. 3월 16일 학교당국의 불성실한 모습에 자극을 받은 학생들은 민주계단에서 집회를 갖고 총장실 무기한 폐쇄, 총장실 집기를 본관 앞으로 들어내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교당국에서는 학생회 간부 몇 명을 제적하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3월 22일 총학생회 진군식 이후 민주적 등록금 책정과 언론탄압분쇄를 위해 학내 집회와 부총장실 점거농성, 삭발, 혈서투쟁 등을 진행하던 중 상명여대(현 상명대) 학원자주화 집회에서 지지, 연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박광철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불법 연행되었다. 이 사실을 안 명지대학교 학생들은 즉각 투쟁을 전개하였고,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경찰은 페퍼포그 3대와 사복전경 10개 중대 1,200여명을 동원하여 학교 주변을 둘러싸고 무력 진압을 예고하였다.
4월 25일 12시부터 6시까지의 시위에 이어, 4월 26일 12시 민주계단에서 22명의 여학생이 서부서 항의방문투쟁 출정식을 갖고 서부서로 향했고, 3시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치른 이후 전경과 대치하였다. 경찰은 유인작전을 구사하며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하여 골목까지 백골단을 배치하면서 폭력적인 강제 진압을 하였다. 바로 이 과정에서 강경대씨가 백골단들로부터 집단 폭행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4월 27일 연세대에서 1만여 명의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모여 '폭력 살인 규탄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졌다. 그리고 4월 29일에는 박승희(전남대)씨가 분신했고, 5월 1일에는 김영균(안동대)씨가, 5월 3일에는 천세용(경원대)씨가 분신하였다. 5월 4일 16만 명의 학생시민이 모여 백골단 해체를 외쳤으나 4월 6일에는 박창수씨가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8일에는 김기설(전민련 사회부장)씨가 서강대에서 분신하였다.
5월 9일에는 전국적으로 30여만명이 모여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를 가졌다. 5월 14일에는 강경대의 장례행렬이 경찰에 의해 막힌 채 밤 10시까지 투쟁을 전개하다가 연세대로 운구를 옮겼다. 5월 18일 2차 장례 중 연세대 앞 굴다리 위에서 이정순씨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하였고, 19일 새벽 운구행렬이 광주에 도착했으나 경찰이 광주 진입을 막았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의 투쟁으로 도청 앞 노제를 사수하고 마침내 5월 20일 망월동 묘역에 강경대씨의 시신은 안장되었다.
(출처 :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 자료관)

위 글에서 본 것처럼 처음 시작은 학내민주화 운동으로 촉발된 명지대학교 내 시위에서 비롯되어 경찰의 무리한 강경진압으로 인해 강경대 열사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이에 학생들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는데 경찰의 강경진압은 계속 되었고, 학내 민주화 투쟁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투쟁은 점점 커져서 정권퇴진운동으로 발전했고,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도 참여하는 범국민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와중에 수 많은 사람들의 분신이 이어지고 김귀정 열사는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쫓겨 충무로 골목에서 경찰의 폭력에 죽음을 맞았다. 필자도 이 당시 충무로 골목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진압이 얼마나 살벌하게 진압되었는지..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를 참고하시길..

 
(신촌에서 있었던 강경대 열사 장례식)

87년 이후 흔히 말하는 넥타이 부대까지 나서서 정권퇴진운동을 벌인 것이 1991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와중에 터진 사건이 바로 '강기훈씨 유서 대필 사건'이다. 수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항거했고, 김기설 열사가 유서를 남기고 분신을 했는데 정권에서는 강기훈씨에 의해 유서가 대필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91년 정권퇴진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급속히 쇠퇴하게 되는데, 이 때 활약한 사람이 바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이야기했던 김지하 시인, "죽음을 사주하는 어두운 세력이 있다"고 분신의 배후로 빨갱이를 지목했던 서강대 박홍 총장이 있었다.


유서대필 vs 유서대필 조작,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

91년 당시 강기훈 씨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감정 결과 하나로 인해 구속되었는데, 이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일반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민주/진보세력은 양심이라는 덕목이 최고였고 국민들도 대부분 인정하고 있었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분신을 하고, 분신을 종용한 사람이 유서를 대필했다는 사건은 그 자체가 충격이었고, 민주/진보세력는 기나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이는 92년 대선 결과에 그대로 투영되어 민자당 김영삼 후보의 압승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이 유서대필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91년 당시에도 조작설은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유서대필이라는 사안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라 조작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점점 멀어져갔다. 오늘 보도된 내용을 보면

"진실화해위는 이날 오후 설명회를 열고 “분신 자살한 김기설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을 새로 발견해, 검찰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사건 자료·증거물과 함께 국과수 및 7개 사설 감정기관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며 “모든 기관에서 유서의 필적은 유서 대필 혐의를 받았던 강기훈씨의 필적과 다르고 김씨 본인의 필적이라는 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국과수는 객관적인 감정을 위해 문서감정실 감정인 5명 모두 참여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진실화해위는 덧붙였다." (한겨레신문)

16년이 지났지만 늦게라도 진실이 밝혀진 점은 너무 다행이다. 하지만 유서대필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고통 속에 살아왔을 강기훈씨와 거리를 뛰어다니며 민주화를 외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응어리는 어떻게 풀 수 있겠는가? 이번 결정을 내린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법원에 재심을 권고했다고 하는데.. 법원에서는 이미 끝난 재판 결과에 대해 번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91년에 유서대필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대필 의혹이 불거졌을 때 국민들이 동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을뿐 아니라 되돌릴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역사가 준 교훈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보수진영의 압도적 우위 속에 이명박/이회창 후보가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고, 흔히 말하는 민주/진보세력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형국이다. 한나라당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것인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이 잃어버린 10년 세월 동안 군사정권 시절 자행되었던 수많은 반인권적인 사안에 대한 바로잡기가 있었다.

해방 후 50년 동안 한나라당의 가치 기반인 보수 정권이 권력을 잡았고, 그 기간 동안 수 많은 인권 탄압이 자행되었고, 50년 동안 수 많은 보수관료/학자가 쉴새 없이 배출되었고, 철옹성에 가까운 보수언론 집단도 형성되었다.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지만, 유서대필사건이 없었다면 잃어버린 15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권을 잡아놓고도 인재풀이 없어서 국정 운영이 미숙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자행되었던 반인권적인 사건에 대해서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나는 더 좋다.

16년전 조작 사건의 전모가 오늘에야 밝혀졌듯이 역사는 후대에 다시 평가를 받아 완성된다. 올 12월에 우리가 행한 선택은 20년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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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본 글에 "진리경찰"이라는 블로그에서 글의 내용과 너무 동떨어진 트랙백을 무려 10개를 보내 주셨습니다. 고민하다가 삭제하기로 했습니다. 혹시 그 분의 주장이 궁금하신 분은 여기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경찰님은 트랙백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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